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BY CRITICS

Taisung Kang
Another Intervention 2012 (KOR) / Intervened Flow 2012

강태성

또다른 개입 (Another Intervention)

개인전 서문, Intervened Flow

갤러리 그림손, 2012

 

작가 신수진은 2005Crossing Gene전의 기획을 통해서, 상호주관적인 개입을 선보였다. 그 전시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여러 작가들이 서로 작품을 보내고 받으면서 합작을 하였다. 그리는 주체로서의 작가와 관람객으로서의 객체라는 구분이 이 전시회에서는 사라졌다. 작품을 받아본 사람은 다른 작가가 작업한 작품을 해석하고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그 위에 작업을 완성한다. 처음 주체가 되었던 작가는 나중에 관람객으로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이 전시를 통해서 개입의 의미를 주체 사이라는 개념으로 파생시켰다.

주체 사이라는 개념은 이번 전시회에서 450 여점의 낱장으로 된 판화 설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관객들이 이 작품 <Intervened Flow 개입된 흐름>의 작업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한 벽에 물의 흐름처럼 보이도록 판화들을 제시한 후, 관람객에게 작품 하나를 선택하게 하고 흔적을 남기게 한다. 그 후 전시장에 전시될 작품은 앞의 Crossing Gene의 상호주관적인 개념을 계속 이어가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러한 개입 외에도 이번 개인전에서는 판화와 회화, 설치 사이에 나타나는 찍음과 그림, 오브제의 관계로 이어지며, 또 다른 주관성의 개입으로 발전하게 된다.

장르간 개입은 스핏바이트 기법과 다양한 액체 표현에서 나타난다. 이 액체적인 흐름의 표현으로 판화라기보다는 회화로 그의 작품을 이해하게도 한다. 기름과 잉크는 마치 투명한 심연이나 물의 흐름처럼, 자유로운 수채화의 느낌을 시원스레 드러낸다. 그래서, 이것은 찍어내기보다는 그리기의 모습을 갖는다. 이러한 판화의 의미는 판화이면서도 판화가 아닌 것 같은 매체의 고유성을 넘어가는 탈장르적인 형상을 보여주며 동시에 실제 판화 위에 회화적인 작업이 부가될 때도 있다.

그의 작품은 병렬적으로 나뉘어진다. 작품 <Trace of Current 흐름의 흔적>이나, <Streamed 흘러나온>에서 보면, 대체적으로 작품은 하나의 화면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7개의 이미지나 5, 또는 3개의 이미지 등 복수의 이미지들이 옆에 놓여 이뤄낸다. 옆에 놓는다는 에파고게(epagoge)의 의미는 병렬적인 의미들을 형성한다. 실제로 작품 <Trace of Current 흐름의 흔적>에서는, 5개의 이미지들이 서로 다른 액체, 물방울의 배치가 이뤄지면서, 독립적인 하나의 이미지들이 이웃한다. 이 이웃을 통해서, 병렬적으로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통해서 일반적인 의미들을 도출한다. 자칫 하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작업이 구체적으로 차이와 반복을 통해 병렬적으로 제시되어, 개념화할 수 없는 개념을 파악하게 한다.

사실, 이 이웃한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병렬성이라기보다 이미지 사이의 흐름과 변화를 읽을 수 있어서, 리듬적인 시각을 찾을 수 있다. 사실 리듬(rhuthmos)은 시나 음악적인 운율을 뜻하기보다는 여기서 흐르는 액체적인 형태에서 드러나는 율동적인 것, 반복적이고 파편적인 다양한 박자와 율동 속에서 파악되며, 쥬스(Jousse)가 리듬을 심장박동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매우 생체적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수진의 작품은 삶에 해당하는 리듬으로 형상화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생명체적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 예로 작품 <Streamed 흘러나온>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체액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7개의 화면으로 이뤄진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같은 이미지를 물감의 농도와 흐름(rhuthmos)의 변화를 통해 이미지 상호간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생각은 유동의 생각이면서도, 흐름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작가의 파란색을 보면, 아스(Geneviève ASSE)의 생각과 연관된다. 아스는 빛을 찾아가며 파란색을 연구한다. 그것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 () 그것은 물질과 제스쳐를 조화롭게 한다고 설명한다. 바로 이러한 일이 대상은 물로 바뀌어 나타나지만, 비교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작가의 행위, 긁고 파고, 잉킹하며 찍어내는 적극적인 행위들과 판화적 물질들예를 들면, 산과 아크릴, 종이, 기름, 잉크 등을 연결시킨다. 아스는 때로는 붓으로 두껍게 그리고 무겁게 물감을 바르며, 강한 투명함에 도달한다. 이 투명함처럼, 신수진에게서도 투명함이 흘러내리는 리듬과 액체, 체액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불투명하고 강한 색과 붓질로 이루어진다. 즉 강한 색을 통해, 막혀있지만 떠있는 듯한 이미지, 떠있으면서도 동시에 투명하고, 그 투명함과 동시에 두터운 느낌은 푸른색의 액체성에 의해 포착된다.

작가는 액체적인 것을 통해서, 단순하게 물이나 액체의 이미지를 얻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광범위한 차원의 조형성을 포착한다. 또한 그의 판화는 때에 따라 드라이포인트로, 때에 따라는 부식을 통해 제작된다. 이뤄진 물방울과 같은 액체들을 작가가 체액으로 설명하듯이, 인간적인 부분을 담아내려는 것이다. 그의 판화의 상처와 체액은 매우 중요한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왜 체액인가?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체액이듯이, 판화의 잉크가 빠져나간 형상은 작가 개인의 상처와 심성을 형상화로 해석된다.

이 작품가운데 강한 둥근 원의 배치가 진하게 때로는 완전히 희석된 듯한 물 빠진 느낌의 푸른색을 보여준다. 이것은 작가가 유성 잉크로 이미지를 찍은 직후, 테레빈유를 부어, 마치 물을 부은 것 같은 수용적의 모습을 그린다. 이것은 체액이 빠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연출한다고 한다. 이 체액은 그의 추상적인 형태 속에 암시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적인 조형의 의미가 포함된다. 그래서, 감성적이고, 인간의 신체의 문제들을 포함시켜 나타낸다. 이러한 것은 매우 은밀하고 내밀하게 움직이는 의미적, 감성적 기호로 작용한다.

작가는 판화 작업에 있어서 병렬과 함께, 하나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사실 앞서 언급했던 투명함 역시, 이 깊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묽고 엷은 푸른색이 연출하는 액체는 때로 짙은 푸른 색에 의해서, ‘깊이의 환영을 그려낸다. 이와 달리, 작가는 판화가로서 하나의 화면을 여러 개의 판으로 겹쳐 찍어 물질적인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깊이의 공간은 이질적인 개입을 가능하게 한다. 작품 <Intervention of Red 빨강의 개입>에서 보면 검은 빛이 도는 짙은 색들은 상처처럼 삽입된다. 조형적으로 붉은 색의 이질적인 개입 외에도 인간의 상처가 강한 자국을 남기며 새겨진다.

이질적인 개입은 바로 이러한 면에서, 조형적인 색상이기보다는 심리적인 상처의 강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한 작품들 중 예를 들면, 작품 <Intervention of Red 빨강의 개입>은 아크릴 판 위에, 선을 긁어, 그것을 색 선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보이는 표면은 실제로는 상처의 자취이다. 상처는 표면을 파괴하는 행위의 감춰지고 공격적인 행동들을 포함한다. 상처는 불어에서 ‘plaie’ 라고 하여, ‘개방된 피부를 의미한다. 이것은 일종의 가는 선적인 주름이면서도, 외부로 개방된 표면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표면은 일종의 표피층과 다른 속 안의 속살과도 같은 속피층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측면에서, 작가는 피부가 아니라, 감춰졌던 진리처럼, 드러낸다.

작가는 판화는 일종의 상처를 내고 그 흔적을 남기는 행동이다라고 지적한다. 이 상처는 사실이다. 표면을 긁어가며, 때로는 강력한 에 넣어, 부식하여 만들어 자국을 내는 심리적, 조형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격성도 숨어 있다. 사실 작가의 서정적이고 고요함 속에 이러한 상처받고, 표피를 찢어내는 듯하고 피부를 한 꺼풀 벗겨내는 이중성은 여리고 잔잔한 화면만을 보게 하나 다른 리얼리티를 숨겨놓아 실제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층위의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는 리듬과 흐름의 논리와 함께 상처를 형상화하며, 깊이와 심연을 만들어낸다. 이 횡적이면서도 종적인 작가의 조형 연구는 이 전시회에서 더욱 섬세한 아름다움을 성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게 된다.

 


%s1 / %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