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BY CRITICS

Jeong-Rak Kim
Flower-ing 2007 (KOR) / Subtle Movement 2007

김정락

생명의 꽃 피우기 (Flower-ing)

SUBTLE MOVEMENT

금호미술관, 2007

    

작가는 아직도 젊다. 그러나 작가의 앳된 외모와는 달리 작품은 노숙한 화가의 것을 떠오르게 만든다. 단견의 인상으로는 작가가 나이와 이력에 비해 매우 깊고 관념적인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과 사물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 형상성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과시적인 화려한 변화보다는 내적인 집적과 응축을 근거로서 작품성을 발전시키고 있었고, 따라서 이번 전시는 그런 발전의 한 과정을 보여주는 장이 될 것이다. 다른 여느 작가와는 달리 신수진은 과정이 지닌 의미를 잘 파악하고, 충실한 의지를 매번 잘 드러내는 작가이다. 결론적이지만 들떠있는 작금의 미술현상과는 전혀 다른, 조신하고 침착한 방식으로 자신의 미술을 이야기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전 나이테나 손금의 형상을 차용하여 생명의 연륜과 그 궤적을 보여주었던 작가는 이제 탄생과 그 생명과정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주제의 맥락은 거의 동일하지만, 플롯의 에필로그에 천착하던 것과는 달리 이제 프롤로그에 주목하게 만든다. 또한 작가가 선택한 기본적인 모듈은 훨씬 단순화되었고, 그와 함께 형상적 수사학도 과감히 절제되었다. 반대로 메시지의 파장은 크게 확장되었다. 이와 함께 작가가 직접 다루는 재료와 방식도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소해졌다. 우선 한지(韓紙)의 사용이 그렇다. 이전 부피가 있는 서양의 판화지를 지양하고 작가는 비교적 자연적 물성이 강한 종이를 선택했고, 이 선택은 자신의 형상작업과도 순하게 어울린다. 그리고 판화 장르 중에서도 비교적 기초적인 것으로 통하는 드라이포인트와 실크스크린을 주로 사용한다. 실크스크린의 경우에도 사진의 전사나 회화적 기법을 옮기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 통용되는 방식이었다면, 작가는 세밀한 손작업으로 그려진 작은 선들의 질감과 필치를 살리기 위해 실크스크린을 이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조밀한 수작업으로 판이 완성되면, 대개의 경우 그것을 프레스 위에서 찍는 것으로 마감하게 되지만, 작가에게 판은 또다시 다양한 작품을 창조하기 위한 기본 모듈로서 기능한다. 하나의 판은 이후 같은 기본형상으로 만들어질 다른 결과물을 위한 단위로서 의미가 있다. 판을 여러 번 겹쳐 찍으면서 작품이 형성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상이하고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 판이 찍혀진 그림이라는 공식을 창조적으로 해체한 결과이며, 목판화의 발명 이후 복수 제작을 위해 존재해 오던 판의 용도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들을 조금 더 미시적으로 접근해 보면, 작은 낱알 또는 작은 잎사귀와 같은 것들이 모여져 커다란 형상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혹은 원형으로 혹은 타원형으로 퍼져나가는 이들의 집합체는 찍는 과정에서 작가가 만들어가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언급한대로 판 작업에서가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지는 것이고, 이 과정은, 물론 작가가 나타날 이미지의 윤곽을 의도한 것이겠지만, 현상적으로 불확정성을 띤다. 마치 절제적인 방식의 all-around-painting이나 action painting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확실한 것은 바로 개체이며, 그 개체의 무리가 이루는 비정형의 몸체는 작가가 지금까지 탐구한 자연과 생명활동 속에서 추출된 형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한계를 끊임없이 넓혀나갈 것 같은 상태로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형태체가 되지만, 그것은 마치 생명을 보유한 유기체적(organic) 형상으로 연상하도록 해준다. 아직 그 유기체적 집합체가 어떤 특정한 무엇이라 단언하기에는 이르다. 왜냐하면 작가가 작품에 부여하고 싶은 이름처럼, 이 형태들은 진행 중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꽃-피우기(flower-ing)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주제와 같이 작품은 잘 완성되어 제시된 결정체라기보다는 과정상의 제시이며 혹은 그 시간의 단면을 잘라 보여주는, 그래서 더 본질적인 의미를 획득하리라고 본다.  

약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작가는 판화가 지닌 본질적인 문제인 복제를 형상작업의 원리로서 보여주고 있다. 수없이 많은 동일한개체들은 스스로를 복제하고 증식한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서 작은 체세포 혹은 낱알들이 스스로를 재생함으로서 생명을 연장하고 삶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작품의 형상구조도 이러한 과정을 재현하고 있으며, 방식에서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그 복제의 과정을 시간의 문제와 결부시키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시간의 문제는 물결의 흐름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선묘(線描)적 이미지에서도 느껴진다. 작가는 자연에서 최소한의 기본 모듈인 이미지를 획득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시간과 운동의 현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조금 현학적으로 그림의 구조를 해석해보면, 작가는 라이프니츠(Leibniz)의 단자(monad)론이나 현대수학의 차원분열도형(fractal)이 보여줄 시각적 모델을 자신의 형상성으로 차용한 듯하다. 그러나 작가는 결정적인 곳에서 그것이 과학적 해설이 아니라 심미성을 제공하는 형상예술임을 증명해 보인다. 그것은 색채와 선의 운동과 그것으로 야기되는 음률과 리듬이라는 점에서 증명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증명하려는 것이 논리와 구조의 불확정성이라기보다는 그냥 내버려둔 생명의 자유로운 선택과 나아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원근을 달리하며 감상해보면, 생명의 단자들이 제각기 자신의 숨을 쉬며 진동하고, 그러한 진동이 점차 큰 작품 공간 내에서 파동으로 그리고 결국 더 큰 하나로 폭발할 것 같은 기운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운동성 혹은 가변성이란 작가가 그려내려는 생명현상일 수도 있으며 작업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내용과 방식의 통일성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삶과 가상적이고 관념화된 모습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관계를 극복하려는 현대미술의 한 의지로서 해석되는데, 보이스(Joseph Beuys)에서부터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를 통해 추구되어온 실제적인 방향성이기도 하다. 작가 신수진은, 언급된 서구의 작가 군들과는 달리 약간은 환유적이고 시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삶의 실제적인 현상과 작업의 과정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서 미술과 삶을 통합하려는 현대적 미술관을 통과하는 의식과 태도를 지녔다. 그러므로 과정의 불확실성은 어쩌면 잘 수습된 모더니즘의 완결주의를 해체하려는 다른 노력이라고 생각되어진다.


%s1 / %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