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BY CRITICS

Jini Yoon
Exhibition Review 2007 (KOR) / Subtle Movement 2007

윤진이

숨은 그림 찾기, 거듭 쓴 양피지 위에서

전시 리뷰 SUBTLE MOVEMENT

금호미술관, 2007

 

전시장 안으로 쏴아 하고 숲의 바람이 인다. 봄꽃이 피어나기도 하고 새순이 돋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형상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린 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토끼나 고래의 모양을 연상하듯이 낡은 벽지 위에서 사람의 얼굴을 언뜻 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처럼 이러한 형상들이 내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이미지 속에 본래부터 들어 있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 신수진의 작업은 거듭 쓴 양피지 혹은 무한 반복되며 한 곳에 복사되어 찍혀 나오는 한글파일의 문서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 기본 단위는 쌀알이나 꽃잎 혹은 눈 모양의 작은 형태이지만 이 기본 형태가 무한히 반복되어 판화로 찍혀지면서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꽃처럼 숲처럼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눈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헤집고 다니며 망상인 듯 이런저런 형태의 환영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단 시작된 이런 자유 연상들은 섬세한 타일의 무늬나 고운 나무 결, 연못을 떠다니는 송사리 떼 등으로 계속해서 변해가며 관람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마치도 그러한 이미지들을 본 듯한 착각을 멈출 수가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동상이몽이라는 건 그 전시장을 다녀간 사람들 저마다의 감상을 듣는 순간 꽤나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일견 꽤나 단순하고 분명해 보이는 판화작품이 어떻게 이런 요술을 부리게 되는 것일까?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판화 매체에 대해 알아보고 나서 그러한 판화를 신수진 작가가 어떻게 살짝 뒤바꾸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판화라는 매체는 본래 인쇄술의 발명과 맥을 같이 하면서 종교화나 도덕적인 장르화의 대중적인 보급에 기여한 바 있다. 그러니까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원본만을 갖는 회화에 비해 여러 번 찍어서 복수의 판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판화는 청동 조각이나 오늘날의 사진, 영화처럼 태생부터 복제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판화의 제작에는 기계적인 복제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개입되어 일단 원판이 만들어지고 나면 기계적으로 찍혀지는 단계에서부터는 개별 판본들이 서로 달라질 여지가 거의 없다. 이로 인해 독창성(originality)과 유일무이성(authenticity)을 중시하는 현대 예술에서 판화가 갖는 복제성은 환영받기 힘든 특성으로 치부되어 왔다. 때문에 현대미술에서 독창성/복제성은 이항대립쌍으로서 전자는 예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후자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창조에는 못 미치는 한계로 부각되면서 작품에서 은폐되고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계적 복제와 독창성은 본래부터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대립항들인 것일까? 작가 신수진은 이 이항대립의 논리를 살짝 비틀어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그녀는 복제기술을 사용하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판화를 만들어 낸다. 한 장의 한지가 거의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무한히 거듭 찍기를 반복한 판화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형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기본 단위가 반복되며 군집을 이루고 있는 판의 흔적들은, 벽에 난 얼룩이나 바위의 균열처럼 우리의 상상을 촉발하여 일깨우고 돕는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수진 작가가 말하는 예술과 과학 혹은 예술과 복제기술이 만나는 길목에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상호작용(interactivity)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라도 짐작할 수 있다. 예술과 복제기술은 본래 대립 관계가 아니고 서로 상호작용하며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제기술의 결과물인 이미지 속에서도 저마다 다양한 고운 피륙을 짜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 점이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을 증진하는 그의 판화의 매력인 듯하다.


%s1 / %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