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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ITICS

Chung-Hwan Kho
Exhibition Review 2008 (KOR) / over.flow.ing 2008

고충환

신수진 개인전 <over.flow.ing> 리뷰

From Art in Culture, November 2008, p.195

북촌미술관, 2008, 10, 3 - 24

 

무슨 볍씨 같기도 하고 낯알 같기도 한, 그런가 하면 나뭇잎 같기도 한 자잘한 이미지들을 동판 가득히 새긴 후, 그 이미지를 종이에 대고 찍는다. 이리 저리 방향과 각도를 달리 하면서 수십번에서 많게는 백 여번에 이르기까지 판을 중첩시켜 찍는다. 그 결과, 화면에는 자잘한 알갱이 이미지들이 모여 일궈낸 보다 큰 이미지, 기하학적 패턴을 연상시키는 이미지, 기의 방출과 흐름 및 운동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이 조성된다.

이때 다소간 정형화된 이미지들이 있는가 하면, 그 틀을 깨는 비정형적인 이미지들도 있는데, 우연을 가장한 유기적이고 자연스런 이미지들이 때론 풀밭이나 흩날리는 꽃잎 같은 실제 자연의 모티프를 떠올리게 한다. 판을 찍는 양상에 따라 생긴 이미지가 자연의 모티프로부터 추상적 패턴에 이르기까지 그 경계를 넘나든다. 결국 감각적 실제와 관념적 실재의 경계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우르는 지점이, 말하자면 그대로 세계 자체 혹은 세계의 상이랄 수 있다. 신수진이 제안하는 세계상은 그 이면에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일궈내는 식의,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을 내장하고 있다. 하나의 알갱이를 최소 단위의 구조로 삼아 이를 반복하고 중첩시키고 부풀려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이나 우주와 같은 궁극적인 어떤 세계를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여기서 알갱이는 말하자면 모나드, 단자, 원소, 즉 자연과 우주와 존재의 씨알들인 것이다. 똑같은 씨알에서 비롯되지만 그 씨알들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는 전부 다르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그 이면에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반복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자연과 우주와 존재가 생성되는 원리를 도해한 일종의 기호나 상징처럼 읽힌다. 그러면서도 그 논리적 프로세스가 드러나 보이는 형식 만큼은 시적이고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리고 추상적인 패턴보다는 자연 모티프를 상기시켜 주는 그림들에서 그 정서적 환기력은 더 배가된다. 담채를 풀어놓은 듯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주는가 하면, 풀벌레 울음소리나 물가의 수분이 느껴지고, 비가시적인 바람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의 씨알 그림이 존재의 생성 원리를 도해하고 있다면, 또 다른 일련의 그림들에선 시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벽 위에 드리워진 나무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화면에다 흐릿하게 전사한 후, 그 표면에 가녀린 실 같은 비정형의 선들을 드라이포인트로 중첩시킨 것이다. 그 형상은 흡사 창호 문을 통해 사물을 보는 것처럼 흐릿하고 아득한 시적 아취가 느껴지며, 한차례 걸러진 햇살과 마주한 것처럼 부드럽고 우호적인 기분이 감촉된다.

이 때 흐릿한 형상이나 그 표면에 중첩된 선들은 시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흐릿해진 형상이 시간이 남긴 흔적이나 기억의 불완전한 복원력을 암시하고, 균일한 듯 자연스런 촘촘하게 그어진 세선들이 중첩된 시간의 결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작가의 일련의 작업들은 존재의 생성 원리나 시간처럼 그 자체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의식을 주제화하고 있으며, 그 빗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대상에다 질료적 형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표정의 바다의 단면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열거한 작업들이 일종의 존재론적 메타포를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사진 위에 무수한 점들을 중첩시킨 작업들이 존재의 씨알을 또 다른 형태로 변주한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런 씨알 이미지를 중첩시켜 흡사 꽃잎이나 나뭇잎이 흩날리는 것 같은 정경을 연출한 벽화에선 자연의 실체가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오면서 시적 감흥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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