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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ITICS

Sang-Yong Sim
Going Deeper into the Garden of Scenopoeetes (KOR) / The Garden of Scenopoeetes 2010

심상용

스케노포이에테스의 정원(The Garden of Scenopoeetes)’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개인전 서문, The Garden of Scenopoeetes

갤러리 차, 2010

 

 

1. 아침 새의 소박한 행위로서의 예술

오늘날 우리는 예술이 전대미문으로 남용되는 광경들을 목격하고 있다. 예술이 더 이상 도구적인 작업의 탁월한 수행을 의미하지도, 궁극적인 진리의미의 추구에 나서지도 않은지 벌써 한 세기를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형식적이거나 조형적인 차원의 순수 미()를 따라 나서는 것 역시 적잖게 공허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인간은 의미가 없는 현실에서는 곧 권태를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동시대미술은 한 때 스스로를 의탁했었던 가치들, 도구적 충실성과 진리의미의 탐구, 순수형식미의 실험으로부터 유리된 채, 과잉인 자아를 끌어안고 목적 부재의 삶을 전전하는, 방황하는 영혼, 주체로부터의 이방인, 내적 유목민의 정서적 증후들, 혼돈, 현기증, 당혹감, 상실감으로 범벅된 일기 같은 것이 되어 있다. 일부는 여권신장이나 노동운동의 행렬에 끼어 거리로 나서는 것 외엔 예술의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정치적이고 섣부른-정치적인 판단이 거의 언제나 그런- 판단을 따라 나섰다.

우리의 포스트-포스트모던(post-postmodern) 미술은 마치 단어를 다루는데 익숙하지 않고, 테크닉이 부족한 사람이 감정적 힘만 잔뜩 실린 단어들-예컨대 해골, 다이아몬드, 성기(性器), 시체, 정신분열, 교통사고, 에이즈, 온갖 배설물 같은-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고도로 충전된 단어들을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일, 일테면 욕망의 과도한, 그리고 철부지적인 분출과 그 이외의 것에 대한 자발적인 무지, 표현의 과잉, 자극 효과 등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대미술의 상황이다. 이미 폭발되어 주워 담을 수 없는 상태에서 폭발직전의 상태를 오가는 감정 상태와 감각의 온갖 궐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담론들이 이젠 아예 대학과 미술관의 기정사실처럼 되어버렸다. “언제나 그랬듯 강한 죄의식-분열된 인격에 대한 생생한 의식-은 어떤 극적인 표현을 요구한다.” (도로시 세이어즈, Dorothy L. Sayers)

이러한 경향은 신수진의 근래의 작업태도에 깃들인 의미를 분별해내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데, 신수진의 예술론은 표현과 언어의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절제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동시대의 감상과 감정적 격앙, 언어의 남용에 가담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의 모티브는 매우 작은 하나의 잎사귀로부터 도래한다. 존재를 압도하는 위엄에 찬 대자연이나 역사의 기념비적인 서사, 문명의 부조리를 다루는 거창한 이념적 틀 같은 것들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는, 특히 우리의 현대는 그같은 뭔가 거창한 담론이 등장하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 하지만,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지불해야만 하는 존재의 값이라 했다. 거창하게 존재할수록 거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아의 과잉이, 부풀려진 문명의 성과가 자주 악마적인 귀결과 관련되는 것을 보라!

물론 신수진의 절제의 미학은 가장 최소한을 지불하는 방식이자 지적 오류나 도덕적 악과 가장 덜 연관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계의 이해에 있어 초입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잎사귀나 잎사귀들을 말할 뿐인 이 세계의 본령은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스케노포이에테스의 정원(The garden of Scenopoeetes)’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스케노포이에테스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등장하는 새로, 매일 아침 가지에서 따 낸 잎사귀를 색이 흐린 쪽이 위로 가도록 해 땅에 떨어뜨려 표지로 삼는다. 작가는 이 작은행위에서 소박하지만 충분한 예술의 실현을 목격한다. 이 미말의 행위에조차 표상과 기능, 표현과 질료, 동기와 행위, 이동과 반전 같은, 심지어 실험미술의 요소들까지 포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복잡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며, 언어에 잔뜩 화약을 장전하거나 상대를 설득하고 선동하는 수단 또한 아니다. 상대를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일 요량의 심금을 울리는 전략이나 군중을 선동할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신문의 판매부수를 수백만 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의 함양 따위와는 그 근본이 다른 것으로서의 예술, 그것이 신수진이 자신의 것으로 삼은 예술론이다. 이 탈확장적이며 반기념비적인 형식에 대한 작가의 신념은 조용하지만 굳다.

신수진은 자신의 관찰, 발견, 해석, 행위가 이 작은 세계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스케노포이에테스의 심오한 정원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이 세계에 내재하는 의미의 고리들과 생의 잠재태를 반복적으로 짚고 확인해낸다. ‘스케노포이에테스의 정원가꾸기로 함축되는 이 세계의 관심사는 어디까지 미의 영역을 확장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깊이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있다.

 

2. 창조성의 한 심오한 패턴

하지만 하나의 잎사귀가 마냥 극소 범주의 표상으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잎사귀는 그 자체 완전한 유기적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태양광에 대한 반응기제, 물과 영양의 조절기제, 뿌리나 가지와의 교신체계, 그리고 다른 어떤 잎사귀들과도 다른 형상과 질료의 미학적 실체가 긴밀하게 구동하고 있다. 하나의 잎사귀는 자신 내에서 욕망하고, 반응하고, 판단하며 독자적인 미적 경험의 강력한 출처가 된다.

신수진은 그 소우주들을 드로잉하고 유연한 판화기법으로 처리하면서 그것들에 회화적 실체를 제공한다. 다양한 밀도의 차이를 담보하면서 운집하거나 확장되도록 배치시킨다. 밀도의 차이는 농도의 차이를 포섭하면서, 화면에 급격하지 않은 톤의 변주를 형성한다. 합리적 판단과 계획을 요구하는 판화장르의 속성에 따라 보다 과정은 신중하게 조정되고 조율되고, 그 결과 화면 전체는 잎사귀들의 중첩과 산포로 구성된 톤의 물결이 잔잔하게 출렁이는 것이 된다. 동일하면서도 상이한 작은 소우주들이 미적인 알고리듬(algorithm)을 따라 배치되고 중첩되면서 획득되는 이 세계는 일체의 외적 드라마는 의연하게 배제한 채 그 안에 어떤 내밀한 은유의 출렁임만을 간직한 절제의 미학의 실현이다.

근래 들어 신수진은 인터렉티브-설치(interactive-installation)에도 자주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스케노포이에테스 정원의 그러한 미적 알고리듬을 더 적극적으로 모색한다는 의미에 부합한다. 전시에 초대된 관람자들은 전시장의 큰 벽에 작가가 가변적으로 설치해놓은 수많은 잎사귀들의 배치를 수정 배치함으로써, 자신 역시 이 세계에서 한 마리의 스케노포이에테스, 곧 소박한 예술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나누어 갖게 되는 것이다. 관람자는 스케노포이에테스의 정원의 단순한 초대객들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셈이기도 한데, 이렇듯 관람자의 빈자리를 인식하고 남겨둠으로써 기름기가 끼고 과도하게 포화된 시각적 어휘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놀이의 위험을 한층 완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모던 아트 이후의 보편화된 예술남용에 대해 확고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는 창조성, 또는 창조적 지성을 영적인 우주의 나뭇결에 비유한다. 그것에 어떤 심오한 패턴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오늘날에 이르러 예술이 그와 같은 나뭇결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는 자리에서 충분히 벗어나 있으며, 오히려 방향상실과 혼돈의 벽을 직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영적 우주의 나뭇결은 신수진이 말하는 스케노포이에테스의 한 작은 잎사귀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우리의 창조성, 창조적 지성 역시 아침 새의 작은 행위에 함축된 어떤 심오한 패턴과 전혀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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