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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ITICS

Sukyung Jung
Flowing Over & Through Shin Sujin 2008 (KOR) / over.flow.ing 2008

정수경

Flowing Over & Through Shin Sujin

개인전 서문, over.flow.ing

북촌미술관, 2008

   

신수진은 약간 높은 목소리톤을 지니고, 가끔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깔깔대기도 하는 쾌활한 작가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이번 개인전에서 전시되고 있는 경쾌하게 흐르는 듯한 작품들이 그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작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서 속으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전에 비해 조금은 갑작스럽게 변모한 그녀의 작품들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던 신수진의 작업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작품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이전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당혹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나타난 듯한 느낌이랄까. 학부 때부터 알고 지내면서 벌써 15년 가까이 작품을 보아왔지만, 그때처럼 많이 변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가만 있어 보자... 수진이의 작업이 옛날에는 어땠더라?' 반강제로 얻어 두었던 석사졸업 작품을 꺼내어 보고 전시도록들을 한참이나 뒤적이니, 기억 한 켠으로 물러났던 신수진의 옛 작품들이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온다.   

대학원 재학 중에 열었던 1996년 신수진의 첫 개인전은 내 기억엔 무척 똑똑한 전시였다. 당시 신수진은 자신의 작업을 가지고 석사 졸업논문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주제가 관념과 실재의 이원적 관계방식(The Dualistic Form of Relation of Idea and Reality)”이었다. 당시 신수진이 작업에서 고민하고 있었던 바, 소위 주제의식이라 할 것이 시각적 경험에 개입하는 관념의 역할이었다. 우리는 우리 눈이 순수하여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것들을 본다고, 볼 수 있다고 믿지만, 실상 우리가 보는 것, 심지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우리의 관념에 의해 보이도록 조건 지어진 것들뿐이라는 깨달음. 그래서 우리가 시각적 경험을 하는 와중에 놓치는 것들, 눈앞에 버젓이 놓여있지만 가려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한 탄식. 그것이 신수진의 작업과 논문을 관통하고 있는 고민이었다. 결국 우리는 중요하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만 보게 된다. “사소하다는 딱지가 붙여진 수많은 대상의 파편들은 우리의 시야를 비껴 순식간에 등 뒤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렇게도 사소한 것이던가? 도대체 누가 그 가치를 결정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놓쳤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것들의 스쳐 지나감을 영민한 화가의 눈은 찰나적으로 포착해버린다. 사실, 화가가 무슨 사소한 것들의 수호자라도 되어서 그것들을 애써 쫓아다니며 포착해내려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저, 눈에 들어왔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눈에 들어온 그것이 맴을 돌면, 이제 그것은 화가의 시각에서는 더 이상 사소할 수 없는 모양이다. 1996년 신수진은 그 사소한것들에 붙들려 있었다.

첫 개인전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작품은 <풍경-시장>이었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알록달록 산뜻한 색면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장에 가면 우리가 늘 눈여겨보게 되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 생선 등에 얹어져 있지 않다. 색이 곱게 입혀진 것들은 우리가 제대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천막, 플라스틱 바구니들이다. 시장의 가운데 통로를 지나는 인물들- 전통적으로 인물들은 회화의 중심을 차지하곤 했다 -은 초점이 나가 흐릿하게 형상화되어 있는데다가 중성적인 갈색톤으로 처리되어 존재감이 참으로 미약해졌다. 중요한 인물과 사소한 소품들 사이의 미묘한 역전.. 그러나 그들 모두를 무심하게 가로막고 있는, 아무 색도 주어지지 않은 세로막대기들로 인해 우리의 시야는 한 번 더 불편하게 차단된다. 작품에서 가장 강렬한 임팩트를 가지고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아닌, 심지어 사소하지도 않은, 색조차 주어지지 않은,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그동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흰색의 여백인 것이다. 만약 이처럼 보잘것없는 여백이 우리의 시각을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사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수진의 <풍경-시장>은 작가가 가지고 있던 주제의식을 매우 선명하게,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보는 이는 작가가 일러주려고 했던 그 지점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념적인 주제를 직설적으로 형상화하다보니 세련되지 못한 감도 없지 않았다. 화폭의 모든 부분들이 시각적 의미를 얻기 위해 아우성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에 비하면 신수진이 위스콘신에서 학위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보여준 작품들은 한결 여유롭고도 깊이 있어진 것들이었다. 2001년의 개인전 <안과 밖-뒤집어 보기>는 신수진의 진정한 역량을 드러내는 서막과도 같은 전시였다. 전시된 작품들의 모티프는 상자와 장갑, 단 두 가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매우 일상적이고 사소한 사물들. 어쩌면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태도는 여전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두 가지 모티프들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다양한 형태와 기법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가 얼마나 판화라는 매체에 대해 능수능란해졌는가를 느낄 수 있다. 1996년의 전시 작품들은 대부분 실크스크린 기법에 의한 것이었지만, 2001년에 전시된 작품들은 리도그래피, 디지털 프린트, 실크스크린, 콜라주, 콜라그래피, 에칭, 브라운프린트 등의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게다가 평면 작업에 한정되지 않고, 판화를 3차원으로 구성하여 설치 작업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법의 다양함과는 대조적으로, 이 시기 신수진의 작업은 색채가 많이 억제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그런 물음을 작가에게 던졌던 적은 없었다. 어쩌면 상자나 장갑이라는 모티프 자체가 색채에 있어 중성적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먼 이국땅에서 이방인 작가로서 작업하는 그녀의 속내가 그런 빛깔이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건 간에, 색채가 약화된 표면으로 매체의 섬세한 결이 떠올랐다. 실크스크린은 깊이감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선의 강조보다는 색채의 강조가 어울리는 기법이다. 그러나 에칭이나 리도그래피는 판화의 선이 얼마나 섬세할 수 있는지, 매체를 다루고 있는 작가의 손길이 얼마나 예민한지를 고스란히 비추어내는 기법이다. 그러한 전통적인 판화 매체들을 다루면서 신수진의 작품들은 작가의 역량을 여실히 드러내는 동시에 이전과는 분명 다른 깊이를 담아내고 있었다.

<A Box><A Taped Box>는 이 전시에서 내가 가장 매료되었던 작품들이다. 앞의 작품에서 반 고흐의 1886년 작 <구두>을 떠올린 건 분명 나의 과잉반응일 테지만, 입구가 그늘져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택배상자는 내용물의 사라짐으로 인해 도리어 도드라진 존재감을 부여받고 있었다. 하이데거가 반 고흐의 <구두>를 보면서 그 구두가 구두 주인의 삶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했던 것처럼, 신수진의 상자는 유학중인 이방인의 삶을 드러내는 지표와도 같이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작가가 대상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때로 작가들은 사소한 대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그 대상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여 그 대상을 물신화한다. 그러나 신수진은 상자 자체를 물신화함으로써 그 가치를 획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수진은 모티프의 형상보다는 인상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상자 자체가 아니라 상자가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부각시켰다. 동시에, 화면의 오른쪽에 상자의 골판 형태를 섬세하게 찍어냄으로써 상자의 내피를 겉으로 드러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부분을 미루어 상상할 수 있게 했다. 신수진이 뒤집어내어 보여주고 싶은 ""은 시각적인 ""과 작가의 "내면"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리라.

<A Taped Box>는 택배상자를 봉하는 플라스틱 테이프를 반복적으로 겹쳐 붙여 판을 만들어 찍은 작품이다. 상자가 담고 있었던 내용물에 비해 사소하게 취급되는 택배상자보다도 더 사소한 게 분명한 플라스틱 테이프는 작가의 손을 거쳐 일정한 무게감과 예술적 가치를 덧입었다. 그에 비해 상자는 실체감 없는 아이콘처럼 단순화되어 그저 선 몇 개가 연결되어 표현되고 있다. 가치의 역전은 여전히 신수진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여유롭다. 신수진의 시선이 일정한 거리와 관조성을 얻은 탓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보았다. 아니면, 모든 걸 다 담아내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일까? 작품은 확실히 훨씬 더 간결해졌다.

한편 장갑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은 아직 좀 덜 무르익었고, 다소간 직설적인 방식으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판화를 하면서 늘 장갑을 사용하기에, 작가는 장갑을 작가의 손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을 에둘러 장갑으로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One of My Days - 8:30 am, 9:00 pm, 3:00pm, 10:00 pm & 7:00 pm>에서 작가는 뒤집어진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장갑들을 보여주고 있다. 왜 뒤집어 놓았을까? 이 역시도 안과 밖을 뒤집어 보겠다는 작가의 의도를 직설적으로 드러낸 것일 터. 시각적 아름다움이 우리를 잡아끌지만, 그 속내는 너무 재빠르게 읽혀버린다.

장갑을 모티프로 삼았던 이 시기의 작업들은 이제와 돌이켜보건대 이후의 작업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시도들이 아니었나 싶다. 일단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장갑은 손을 대신하는 은유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술가의 손"이라는 것은 너무나 전통적인 미술의 냄새를 풍겨서, 2000년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는 약간은 진부하고 고루한 인상을 줄 것으로 걱정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래서 장갑으로 형상화한 것인가? 장갑 연작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은 혹 작가의 이런 머뭇거림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국 미술가에게 있어 손은 그야말로 신체의 가장 실존적인 부분이다. 2001년의 장갑 연작에서는 그 손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엿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신수진이 유난히 많이 형상화시키고 있는 목장갑은 일정한 결이 계속 반복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시기부터 신수진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미세한 결의 반복이 특징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했다. <A Puzzle>이나 <Impressionist's Gloves>와 같은 작품을 보면 장갑의 전체적인 모양은 상실되고, 대신에 특정 부분의 작은 결이 확대되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은 유닛이 계속 반복되는 최근의 작업은 이미 2001년경부터 그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로부터 약 4년이 지난 20051월에 웅 갤러리에서 있었던 <Handscape>전에서 신수진은 마침내 ""을 중심 모티프로 세우고야 말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로댕의 1898년 작 <신의 손>을 매우 좋아한다. 이 작품은 신의 손아귀에서 인간이 탄생하고 있는 장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실상 이 "신의 손"은 로댕 자신의 손이 아니었겠는가? 신의 창조에 비견될만한 미술적 창조의 힘은 미술가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술가의 손은 창조자로서의 미술가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판화라는 매체는 회화나 조각에 비해 손의 노고가 덜 드는 매체로 오인되어 왔다. 한 번 판을 만들면 복수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판화 매체의 특성이 판화를 제작하는 미술가의 노고를 폄하하게 한 것일 터이다. 게다가 현대미술은 고의적으로 미술가의 손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써왔다. 이런 이중의 조건 속에서 판화 작가가 자신의 손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수진은 그러한 시각에 고집스럽게 시비를 건다  

"작가의 손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문명시대에 점차 잃어가고 있는 노동, 시간의 흐름, 그리고 촉각되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향수를 대변한다."

- 2005<Handscape> 도록 서문 중에서  

사실, 결과물의 수월해 보이는 인상과는 반대로, 판화는 힘이 많이 드는 매체다. 신수진의 작업방식은 더욱 그렇다. 게다가, 갈수록 그렇다. 다양한 매체들을 복합적으로 사용하고, 판 자체를 유난스러우리만치 섬세하게 세부를 강조하여 만들며,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참 많은 횟수를 찍어낸다. 그래서일까, 신수진은 한 해에 새로운 작품을 많이 내어놓지 못하는 과작가(寡作家)에 속한다.

<Handscape>전에서 신수진은 한 사람 한 사람 인간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손금과 지문의 생김새를 풍경(Landscape)에 빗대어 형상화했다. 작가가 주목하는 풍경의 대변인은 나무의 나이테다. 나이테란 무엇이던가? 그것은 세월의 흔적, 환경이 나무에게 각인시켜놓은 기억이다. 손금과 지문을 나이테에 비견함으로써 작가는 손금과 지문을 선천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도전한다. 작가의 손바닥에 새겨진 수많은 선들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어떤 세월을 보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Landscape of Trace-Time>에서 작가의 손금-지문은 나무의 나이테와 중첩되어 수없이 겹쳐진 선의 형상을 이루어내고 있다. 어찌 보면 피가 도는 듯한 검붉은 색으로 인해 묘한 생명감을 얻는 이 작품은 손금-지문과 나이테를 확대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그 섬세한 결에 가서 맺히게 한다. 작은 손바닥 하나에 이렇게도 많은 선들이 담겨 있다는 건, 사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작가의 섬세한 형상화를 통해 새롭게 각인된다. 손금도 살아온 인생역정에 의해 변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곁에 걸린 고지도, 나이테, 지문들과 어우러지면서 이 작품은 작가 개인, 관람자, 어디에서 베어졌는지 알 수 없을 나무, 이 땅 모두가 지내온 시간의 흔적, 인고의 세월을 말없이 토해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도 신수진은 그 섬세한 결을 드러내는데 몰두해있었다. 2007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되었던 <Penetrating>2005년의 전시와 2007년의 전시를 맺어주고 있다. 그러나 2007년 이후의 작품에서 그 결은 인고의 세월, 추운 겨울이 남겨준 고통스러운 결이 아니라 그 겨울을 견뎌내고 피워낸 봄의 꽃, 꽃피움(Flower-ing)의 결로 변화하고 있었다. 나는 그 변화를 초래한 것이 신수진 작가의 인생에 있어서의 또 한 번의 봄날-결혼이라고 생각했다. 나이테와 손금-지문이 나풀거리는 꽃잎과 여린 나뭇잎으로 변화한 것을 설명하기에 꽤나 그럴듯한 이유 아닌가? 물론 작가에게 확인해본 적은 없다.

2007년 금호미술관에서의 <Subtle Movement> 전시 이후의 작업들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가볍다. 예컨대 <Blowing>에서는 하나하나로 치면 1g도 나가지 않을 것같이 보이는 작은 유닛들이 수도 없이 모여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들 각각은 안이 비워진 모양이기 때문에 가벼워 보이고, 색채가 선명하고 산뜻하기 때문에 또 한 번 가벼워 보이며, 참으로 꽃이 피어나듯 터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가벼워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하나하나의 유닛을 들여다보라. 하나하나의 유닛들이 얼마나 많은 섬세한 선들로 형성되어 있는지.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유닛들이 필요한지. 외면화된 찬란함의 뒤에는 여전히 인고의 시간을 요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의 과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과정, 나비가 고치를 째고 날아오르는 과정,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는 어디든 고통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처럼 돌이켜보고 나니, 신수진의 작업은 겉으로는 많이 변했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하나의 흐름을 타고 있었던 셈이다. 나의 놀란 가슴은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나 자신의 탓일 따름이다. 어째 신수진의 첫 개인전 주제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했던가? 어줍지 않게 작가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작품을 보는 눈을 가렸던 모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음의 때를 씻고 신수진의 작품을 오롯이 즐겨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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